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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s of Romance/with transparent wings

[진행] 라쇼몽(羅生門)

라쇼몽(羅生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2009년 8월 29일 작성 시작
2010년 3월 16일 현재 3회차 번역 & 수정

어느 날 저녁 무렵의 일이다. 한 명의 하인(下人)이 라쇼몽(羅生門)[각주:1]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문 아래에는 이 남자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저 여기저기 주칠(朱漆)이 벗겨진, 커다란 둥근 기둥에 귀뚜라미가 한 마리 앉아있다. 라쇼몽이 스자쿠 대로(朱雀大路)[각주:2]에 있는 이상은, 이 남자 외에도 비를 피하는 이치메가사(市女笠)[각주:3]나 모미에보시(揉烏帽子)[각주:4]가 두세 명 더 있을 법 하다. 그것이, 이 남자 외에는 아무도 없다.
왜냐고 한다면 이 2~3년, 쿄토(京都)에는 지진이나 회오리바람, 화재나 기근 등의 재난이 잇달아 일어났다. 거기에 도성 안이 황폐해지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다. 옛 기록에 의하면 불상(佛像)과 불구(佛具)를 때려부수어, 그 주칠을 했거나 금은박이 입혀진 나무를 길가에 겹겹이 쌓아 땔감으로 팔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성 안이 그런 꼴이기에 라쇼몽의 수리 따위는 애초에 모두가 모른 체하며 돌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그 몹시도 황폐해짐을 좋다고 여겨, 여우가 서식한다. 도둑이 산다. 결국 끝에는 거두어 들일 사람 없는 시신을 이 문에 가지고 와서 버리고 가는 풍습마저 생겼다. 그런 까닭으로 햇빛이 보이지 않게 되면 모두가 꺼림칙해 하며, 이 문 근처에는 발을 들이지 않게 되고 만 것이다.
그 대신에 또 까마귀가 어디선가 잔뜩 몰려왔다. 낮에 보면 그 까마귀가 몇 마리 없이 원을 그리며, 높은 망새 주변을 울며 맴돌고 있다. 특히 그 문 위의 하늘이 석양으로 밝게 되는 때에는 그것이 참깨를 뿌린 듯 선명하게 보였다. 까마귀는, 물론 문 위에 있는 시신의 살을 쪼아먹으러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오늘은 때가 늦은 탓인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군데군데 무너져내린, 그렇게 무너진 곳에 긴 잡초가 자란 돌계단 위에 까마귀 똥이 여기저기 하얗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하인은 일곱 개의 돌계단 가장 윗 단에, 여러 번 빨아 빛이 바랜 감색 아오(襖)[각주:5]를 깔고 앉아, 오른 쪽 볼에 난 커다란 여드름을 신경쓰면서 망연하게 비가 내리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작자는 앞서,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하인은 비가 그쳐도 특별히 어떻게 하려는 목적은 없다. 보통이라면 물론 주인 집에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으로부터는 4~5일 전에 해고당했다. 앞서도 썼듯이 당시 쿄토 거리는 웬만한 이상으로 쇠미해져 있었다. 지금 이 하인이 오랜 세월 섬긴 주인에게서 해고당한 것도 실은 이 쇠미함의 작은 여파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도 「비에 갇힌 하인이 갈 곳이 없이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 쪽이 적당하다. 게다가 오늘의 하늘 모양은 적잖이 이 헤이안(平安) 조(朝) 하인의 센티멘털리즘[각주:6]에 영향을 미쳤다. 신(申)시[각주:7]가 조금 지나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도 멎을 기색이 없다. 거기에 하인은 무엇을 제쳐놓아도 당장 내일의 생활을 어떻게든 해보려고―말하자면 어떻게 해도 안되는 일을 어떻게든 하려고, 두서없는 생각을 더듬으며 조금 전부터 스자쿠 대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지도 않으며 듣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라쇼몽을 감싸며 멀리서 쏴아 하는 소리를 모아 온다. 땅거미는 점점 하늘을 낮추며, 올려다보면 문의 지붕이 비스듬히 튀어나온 용마루 끝에 묵직하게 어둑한 구름을 지탱하고 있다.
어떻게 해도 안될 일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고르고 있을 겨를은 없다. 고르고 있으면, 토담 아래나 길가의 흙 위에서 아사(餓死)할 뿐이다. 그리고 이 문 위에 옮겨져 개처럼 버려질 뿐인 것이다. 고르지 않는다면―하인의 생각은 몇 번이고 같은 길을 생각에 잠겨 거닐은 끝에 이윽고 이 한 부분에 봉착했다. 그러나 이 「않는다면」은, 아무리 지나도 「않는다면」이었다. 하인은 수단을 고르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이 「않는다면」의 방법을 취하기 위해, 당연히 그 후에 오게 될 「도둑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뿐인, 용기가 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인은 큰 재채기를 한 다음에 귀찮은 듯 일어섰다.


  1. 라쇼몽(羅生門) : 라죠몽(羅城門)이라고도 한다. 스자쿠 대로(朱雀大路)의 남단에 있으며, 헤이안 쿄(平安京, 지금의 쿄토(京都)) 정남쪽에 위치했던 대문. 토우지(東寺) 서쪽에 그 흔적이 있다. [본문으로]
  2. 스자쿠 대로(朱雀大路) : 헤이안 쿄의 다이다이리(大内裏, 궁궐과 여러 관청이 있는 구역의 총칭) 남면의 스자쿠몽(朱雀門)에서 라죠몽에 달하는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 [본문으로]
  3. 이치메가사(市女笠) : 가운데가 튀어나온 사초(沙草)·대나무 껍질등으로 엮은 삿갓. 본래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여자가 썼지만, 헤이안 중기 이후에는 주로 상류층 여성이 외출용으로 썼다. [본문으로]
  4. 모미에보시(揉烏帽子) : 부드럽게 비벼 주름을 잡은 에보시(烏帽子, 건(巾))으로, 투구 밑에 썼다. [본문으로]
  5. 아오(襖) : 양쪽 겨드랑이가 트인 채 꿰매지 않은, 옷자락이 없는 상의. 사위(四位) 이하의 무관이 입었다. [본문으로]
  6. 센티멘털리즘 : sentimentalism, 감상주의. [본문으로]
  7. 신(申)시 : 오후 4시 경. 오후 3시 ~ 5시 사이. [본문으로]